『세속의 철학자들』, 로버트 하일브로너 (1998)

몇 달 전에 써둔 것인데, 여기에 올리기 위한 것 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쓰려고 했던 것이고 나의 감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짱박아 뒀었는데 더 고쳐볼 용기가 없어서 그냥 올린다. 도입부의 상투적인 표현에서도 사실 피식하고 웃음이 나긴 하지만 고치기가 귀찮스빈다. -_-;; 리뷰 스따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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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12년 정규교육과정을 별 탈 없이 끝마친 학생이라면 ‘자유경쟁’이 사회에 가져다주는 효율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주도권을 가지고 사회를 운영하는 소위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를 반복적으로 가르쳐주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상기되어 있는 젊은 뇌는 명문대라는 황금관을 뒤집어쓰기 위해 사전적 지식을 쌓는 도구로 전락했다. 객관적인 자료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단언컨대 90% 이상의 학생들은 이와 같은 경쟁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을 것이고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진리, ‘자유경쟁’이란 네 글자가 그와 같이 견디기 힘든 억압을 정당화 해주었다. 길고 길었던 입시경쟁의 레이스를 끝마친 이 시점에도 여전히 청년실업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건너야 하는 과제가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져있다. 한 번쯤 뒤를 돌아보고, 잠시 멈춰 생각해본다. ‘자유’와 ‘경쟁’이라는 두 단어의 기묘한 결합에 대해서. 따지고 보면 별로 상관없는 두 단어가 어째서 찰떡궁합처럼 찰싹 들러붙었을까. 그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12년간 정해진 수식에 맞춰 수학문제를 푸는 방법과 오지선다형 문제에 담긴 함정을 피해 만점 받는 법에 골몰하느라 뇌가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딱딱하다.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저서는 그다지 건조하지 않은 문체로 그에 대한 답에 근접하도록 이끌어준다. 자유방임 경제를 주장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아담 스미스부터 양대전 이후 경제순환론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조지프 슘페터까지 쟁쟁한 경제학자들의 사상과 생애에 관해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은 ‘위대한 경제학자’ 따위가 아닌 『세속의 철학자들』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학자들에게는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과 미래의 ‘비전(vision)'이 있다. 저자는 그런 공통점 때문에 이들을 한 책으로 불러들였으며,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만일 경제학 전공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이미 한 물 간 ‘정치경제학’의 부산물이라며 비꼴 것이다. 미적분을 통해 함수 그래프를 분석하기에 바쁜 경제학자들에게 철학자라는 이름을 붙인 점에 대해서도 넌센스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이미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듯이 경제학이 과학적 방법론에 열광하고 그것을 재빨리 흡수한 이래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현실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힘들다는 비판은 아직도 유효하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제기 속에서도 고고한 자존심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 경향은 경제학의 존립기반을 위협한다는 지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주류 경제학의 ‘배신’이 기정사실화 된 이 시점에서 하일브로너는 경제학이 탄생되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유사 이래 인류가 먹고살기 위해 형성했던 세 가지 유형의 사회 대해 언급한다.


 선지자들이 쌓은 지식을 관습에 따라 대물림하는 방식 즉, 전통이나 습관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회, 고대 노예제나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와 같이 권위적 통치(명령)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장체제로 운영되는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명령과 관습에 의해 운영되었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쌓여온 인류의 지혜와, 절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에 의해 계급이 나뉘고 그에 따라 생활상이 달라진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가질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이 붕괴된 후의 근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지배계급은 아담스미스의 사상을 빌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시장체제가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의 이익에 따른 행동만으로 잘 돌아갈 수 있는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기 힘들었다. 당시에 태동한 시장체제에 관습이란 없었고 그것에 대한 천부적 권위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이 짊어진 몫은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이 운영되는 질서와 미래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책은 현재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내다버린 경제학 본연의 역할을 되짚어가며,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울 수 없었던 논리를 도맡아 가르쳐준다. 더불어 어째서 자유경쟁이 그토록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논리로 작용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어렴풋이 그러나 비교적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난 당혹감은 그간 주류 경제학자들이 조롱했던 고전 경제학과 정치 경제학의 성과가 현재 우리 삶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데서 기인한다. 또 다른 당혹감은 시장체제의 비전은 더 이상 경제학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비전을 찾아야 할 것인가?


 냉전체제가 종식된 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단언했듯이 역사는 더 이상 진보하지 않고 이 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인가? 아니면 저 옛날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모순으로 인해 붕괴할 것인가? 선뜻 어느 것도 정확한 답으로 고를 수는 없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뒤에도 세계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고, 마르크스가 예측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환부들이 여기저기서 곪아터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의 비전을 선택하는 것은 경제학자도 아니요, 정치가들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나의 삶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찰와 철통같은 논리가 눈앞에 놓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이성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압박과, 나에게 지워진 의무의 실체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판단하는 것은 결국 내가 될 것이다. 하일브로너의 이 탁월한 성과물은 이와 같은 생각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by 바둑이 | 2007/08/24 01:26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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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風林火山 at 2009/01/07 20:20
Naver Opencast의 "風林火山의 분야별 대표 도서 소개"(http://opencast.naver.com/BK175)라는 캐스트의 캐스터 風林火山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제 캐스트에 발행했는데, 혹시라도 발행을 원치 않으시면 '캐스터에게 한마디'에 적어주시거나, itmedusa@gmail.com으로 메일 주세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바둑이 at 2009/04/17 19:51
風林火山/ 좋은캐스트를 운영하고 계시네요. 늦은 답변이지만 퍼가셔도 관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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