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7월 21일
자공, 소설에 먹히다
신중함이 필요한 이유.
좀 쉬고 싶어도 소설은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싸움을 걸어왔다. 쓸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보채는가 하면,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점잖게 공갈을 치기도 했고,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어낸 천여 명의 작중인물은 사전 예고도 없이 그의 눈앞에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뽕타운의 야생초 추가 재배를 반대하다 슬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장편<붉은 파도> 속의 청년은, 소통의 또 다른 장편 <탱크와 나비>에 나오는 정의로운 하사관보다 자신이 덜 개성 있게 그려졌다고 노상 불만을 터뜨렸다. 한밤중이거나 식사 중일 때거나 할 것 없이 아무렇게나 불쑥 나타나 맹렬하게 항의해대는 그들을 당장은 귀찮아 적당히 사과하고 무마하여 돌려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놈들의 멱살을 틀어잡고 큰 소리로 맞대거리 칠 때도 종종 있었다.
"너희들은 숙명적으로 같을 수가 없어. 나의 분신이지만 다 다른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러면 그들은 말했다.
"똑같길 원하는 게 아냐. 나는 걔보다 좀 덜 떨어진 것 같아. 묘사가 치밀하지 못했다는 걸 말하려는 거야!"
서통은 그들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서통은 혼자였고, 앞으로 탄생할 인물을 제외한대도 그들은 천 명이 넘었다. 하루에 한 명 씩 찾아와 욱대긴대도 삼 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졌어 네 성격을 다시 수정해 주겠어."
라고 그는 번번이 두 손을 들었고, 그 약속을 지키느라 새로쓰기 시작한 소설에 이전의 등장인물을 다시 등장시켜 성격을 수정하고 부분적으로 성형수술도 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자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쳤다. 도대체 서통이라는 작자는 뭐하는 사람이길래 허구한 날 그렇고 그런 인물밖에 창조하지 못하는 것이며, 재탕 삼탕 우려먹는 것이며, 은근슬쩍 독자를 속이려 드느냐는 거였다. 혹시 작가 자신이 작중인물들처럼 아무런 독창성도 개성도 없이 서푼짜리 매문 행위나 일삼는 고루한 짬뽕이 아니냐며, 그의 창밖으로 달려와 노골적으로 시위하는 독자도 없지 않았다.
서통은 천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의 시도 때도 없는 성화와, 분개한 독자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장 난 베틀 돌리듯 덜컥덜컥 아주 힘겹게 원고지를 메워 나갔다. "니가 날 아주 죽어라죽어라 하는구나." 그는 너무 얻어터져 정신을 못 차리는 권투선수가 거의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뻗듯 펜을 휘둘렀고,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이 소설 밖에 있는 것인지 소설 안에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작중인물을 자신의 구상대로 완벽하게 조종하고 설득하며 소설을 의도한 대로 진전시켜 나아가던 초창기의 즐거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너무도 많은 자신의 분신을 허겁지겁 만들어 뿌려놓은 나머지, 나중에는 그들이 어디에 무슨 꼴로 박혀 있으며, 어떤 사연을 갖고 죽어갔는지 까맣게 모르게 됐다. 등장인물들의 빗발치는 성토와 한탄은 당연한 것이었다.
# by | 2010/07/21 17:51 | infection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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